355억원짜리 그림과 추상미술
2020-02-26 17:49:08
 

 
문제의 게시글이다. 장 미쉘 바스키아. 작품 이름은 무제.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단박에 끄는 것은 무려 이 그림이 355억원이나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그만한 가치를 지녔다는 것인데, 납득이 안 갈수도 있을 것이다.(나도 그랬다)
 
여느때와 같이 댓글에는 개드립 토론회가 열리고 있었고, 의견은 간단하게 둘로 갈렸다.
 
원색하게 표현하자면,
 
그림 ㅈ같은데 왜 355억원씩이나 함? VS 바스키아도 까이는거임? 좆노답ㅋㅋ
 
대충 이런 식인데, 그림에 대해 부정적인 쪽의 입장을 들어보겠다.
 
 
1. 좃같으면 깔수도 있지 뭘 좃노답까지 ㅋㅋ
 
2. 저 그림을 평가하기 위해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면 당장 저 그림만 보고
355억이란 가격에 납득 못하는건 일반적인 반응 같은데?
 
3. 개드립에선 모든걸 다 까는데 이상하게도 현대미술 주제가 나오면
힙스터들 총 출동해서 교양없는 좆반인들ㅉㅉ 난 너희들과는 다른 존재야ㅎㅎ 하는게 좀 꼽다
 
4. 버스피아가 뭔진 모르겠고 저게 대체 왜 시발 예술임 나도 예술할래
 
 
작품 자체의 평가는 없고 그림이 까여 마땅하다는 발언들이 많다.
 
아무래도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 그림을 '나름대로 치장한다는 것'에 대한 반감의 영향이 크지 않나 싶다.
 
 
그럼 그림을 옹호하는 쪽의 입장을 들어보겠다.
 
 
1. 바스키아가 추상주의자들처럼 극도로 미니멀 한 것도 아니고 다채로운 색상 사용에
다양한 채색기법 그리고 흑인문화와 길거리문화 까지 흥미로운 요소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전통적인 회화 방식에 어긋난다고 조롱하는걸보니 안타까워서
 
2. 대부분의 글이 그림 좆같다는 원색적 비난인데 이게 정상적인거임?
 
3. 욕하는 놈들은 뭐가 그리 불만인거냐;
현대미술 알아보지도 않고 깐건 지들이면서 왜 지랄하는거임
 
 
역시 '무제'라는 작품 자체가 지닌 의의를 설명하기보단, 무턱대고 그림을 까는 행위에 대한 안타까움이 드러난 듯 하다.
 
그림을 까는 쪽과 그림을 인정하는 쪽 모두 상대에게 좋은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까웠다.
 
나는 어느쪽이 옳다 그르다를 논하려는게 아니다.
 
개붕이들이 댓글로 난타전을 벌이게 된 이유는 추상화의 
주관적 해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제부터 바스키아의 작품이 까이게 된 이유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분석을 말해보고자 한다.
 
 
 
'바스키아가 추상주의자들처럼 극도로 미니멀 한 것도 아니고' 라는 발언을 주목해보자.
 
아마 댓글을 쓴 사람은 추상미술을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이유가 극도의 단순성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추상주의 작품이 미니멀하다는 것은 이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몬드리안 -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 2>
 
그렇다. 딱 봐도 단순해 보이지 않는가?
 
추상미술은 재현적 가치를 부정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추상적인 의미 전달에 중점을 둔다.
 
따라서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선과 면을 기하학적으로 구성하여 언뜻 보면 단순해 보이기도 한다.
 
사실적 재현을 부정함으로써, 추상미술은 기존의 예술이 가지고 있던 틀을 깨고,
 
서양미술의 전통을 거부하게 된다.
 
 
뭐야 이거 그냥 힙스터 ㅅㄲ 아녀?
 
 
 
맞는 말이다. 저항문화의 상징이란 점에서 힙스터는 추상미술가와 닮았다.
 
한 놈은 캔버스에 붓질할 때 다른 놈은 붐박스 어깨에 들쳐매고 궁딩이를 흔들었단 점만 빼면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추상미술가들을 베베 꼬이게 만들었을까? 
 
 
 
'두 번의 세계대전'
 

 
지리멸렬한 참호전과 독가스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사람들.
 
총탄에 맞아 쓰러진 수많은 청년들. 대학살과 겁탈. 방화. 문화재의 약탈과 파괴.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인종 청소와 대규모 폭격.
 
세계는 화약 냄새에 휩싸이고 인류는 두 차례의 대규모 총력전을 겪게 된다.
 
 

 
고대 그리스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의 이성중심, 합리적 가치관은
 
전쟁이 야기한 불평등과 비합리성, 부조리와 혼란에 의해 박살이 난다.
 
예술가들은 대대적인 살육과 비극의 현장을 경험하게 되었고, 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지는 모습을 목격한다.
 
정형성, 합리성의 원천이었던 자연의 완벽한 모방은 이제 의미를 잃게 되고, 예술가들은 현실의 제현에서 벗어난다.
 
자연의 대상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 예술가들은 원시적인 기호로 인간 내면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 것이다.
 
 
 
'원시 미술'
 
그 어떤 정형화된 형태나 기법이 없었던 시기. 원시시대로 눈길을 돌려 보자. 원시시대의 호모 사피엔스가 남긴 작품이다.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이다.
 

 
피카소의 '황소'
 
동굴 벽화와 피카소의 그림이 묘하게 닮지 않았는가?
 
실제로 피카소는 알타미라 동굴벽화에서 영감을 얻어 본인만의 추상화 기법을 탄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피카소는 이 원시적인 형태를 이리저리 늘이고 줄인다음, 지 맘대로 뭉개고 퍼트려서 추상의 단계를 완성한다.
 

 
단계를 거듭할수록 본래의 형상은 사라지고 선 몇 가닥만 남은 것이 눈에 띌 것이다.
 
이는 추상화 과정을 설명하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는데, 대상을 실제처럼 묘사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상의 디테일을 과감히 생략하더라도 여전히 '소'임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추상화 과정이 우리의 뇌가 형태를 단순화하여 인식하는 방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는 처음에 언급한 미니멀리즘의 예시가 될 수도 있다.
 
원시적인 기호는 쉽고 직관적으로 정보를 습득할 수 있고, 사고 과정을 단순화해줄 수 있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애플의 디자인
 
애플의 성공 뒤에는 직관적이고 단순한 디자인 철칙이 숨어있다.
 
 
 
 
노하우가 필요한 감상...?
 

본론으로 돌아가서 확대된 바스키아의 작품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자.
 
이 그림은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분명 추상미술의 범주에 속한다.
 
바스키아는 본인 나름의 방법대로 '형태를 이리저리 늘이고 줄인다음, 지 맘대로 뭉개고 퍼트려서 추상의 단계를 완성' 한 것이다.
 
정형적인 회화적 요소에서 벗어난 작품이며, 작가는 분명 이 그림을 통해 추상적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다만 이런 종류의 그림을 감상할 때는 작가에 대한 전후 맥락이 동원되어야 한다.
 
추상미술에 일반 대중이 다가가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감상자는 생전 작가의 인터뷰, 각종 문헌과 글을 종합한 후 주관적 감상을 덧붙여 가며 작품을 해독해 나가야 한다.
 
작가의 그림 속 기호들을 '해독'하는 방법과 과정은 작가에게 다가가는 일종의 '노하우'가 될 것이며,
 
작가의 세계관이 지향하는 바와 그 매력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즉, 감상자의 능동적 태도에 따라
 
이 그림이 355억원의 가치를 지닌 작품일지,
 
한낮 낙서에 불과한지를 결정짓는 것이다.
 
 
다만, 작품에 대해 능동적 태도를 지닐지 말지를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이며, ‘강요’되어서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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