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압록강 이북과 서쪽 지역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여진의 각 부족들은 서로간에 지배권을 가지기 위해 피터지게 싸웠다. 명과 조선의 사이에 끼어 확장성을 가질 수 없으니
한 곳에 모인 이들이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얼마나 처절히 싸웠을지는 짐작하기가 어렵다. 오토바이 대신 말을 타고 다니는 북두의 권 세계가 아니었을까.
명나라는 이들 여진이 구심점을 두고 큰 세력을 형성치 못하도록 여진의 각 세력들을 이간시키고, 또 힘을 실어주기도 하면서 통제했다.
그러던 와중 아타이의 난이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왕고가 명군에게 패퇴하고 죽임을 당한 것에 분노하여
고륵성을 거점으로 하여 명군에 공격을 감행하고 주변 명나라 영토를 약탈한다.
그러나 명의 대응은 빨랐다. 총병 이성량은 다른 여진 부족장 -특히 퉁기야 푸쿠루-을 앞세워 아타이를 격퇴한다.
그러다가 아타이가 다시 몸을 회복하고 군대를 일으키자 아예 그의 거점 고륵성을 포위한다.
여기서 여진의 또 다른 친명파 부족장, 기오창가와 그 아들 타크시가 등장한다. 이 둘은 전쟁에 종군하다가 명군에 의해 오인살해 당한다.
(오인살해설이 다수설이기에 이렇게 표기한다. 단순 전투중 전사, 퉁기야 푸쿠루에 의한, 오해를 가장한 의도적인 살해등 다른 가설들도 존재한다)
이성량은 이 둘이 죽자, 기오창가의 장손자이자 타크시의 장남에게 둘의 유산을 배분하고 위로의 뜻과 명나라 차원의 보상금을 전한다.
순식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은 청년은 조용히 눈물을 삼키면서 명에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하지만 청년의 마음속엔 이미 복수의 불길이 조용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누르하치.
후일 여진 세력을 제패하고 만주를 통일하는 이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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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륵성 전투에서 친명파 여진 부족장 기오창가와 그 아들 타크시가 명군에게 살해당하여 죽었다. 그것은 오인살해의 가능성, 다른 여진부족장 퉁기야 부쿠루에 의한 계획된 모략에 의한 살해의 가능성등 여러 가능성이 존재했다. 적어도 사서를 볼 때에 기오창가의 손자이자 타크시의 아들인 누르하치 본인은, 퉁기야 부쿠루가 계략을 짜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 아타이의 난 진압 이후 부쿠루가 건주 여진의 실력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퉁기야 부쿠루를 원수로 생각했고 명 또한 원수로 생각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명에 충성을 맹세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그들에 의해 죽었지만 당장 복수랍시고 칼을 빼들었다간 자신은 짓밟혀 죽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명의 총병 이성량은 그런 누르하치를 불쌍히 여겨 보상을 주고 아버지의 세력을 일부나마 이어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성량은 원래도 누르하치와 나름 안면식이 있던 인물이었기에 이런 조치를 행한 것이다. 사실 안면식 정도가 아니라, 누르하치는 이성량과 함께 꽤 긴 세월을 함께 했다. 그의 밑에서 종군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누르하치의 뒤를 봐준 이성량과는 달리, 다른 명나라의 사령관들은 누르하치 나부랭이(당시만 해도 누르하치는 영향력도 힘도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보다는, 명에 보다 충성적이면서도 강한 세력을 가진 부쿠루를 지원했다. 누르하치는 이 조치에 상당한 불만을 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복수의 칼날을 조용히 갈아나갔다. 100명에 불과한 장정과 13벌의 갑주만이 있는 그였지만, 그는 부쿠루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이들과 연대해나가면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누르하치는 복수를 시작했다. 그는 우선 명나라에 부쿠루에게 복수를 하게 해달라고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당연히 명나라는 이를 씹었다. 그들은 고작 100여명의 장졸만 있는 애송이 따위의 서신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이것을 빌미로 삼아 자신과 뜻을 함께 할 이들 역시 우후죽순으로 들고 일어나게 했다. 막강한 군대가 갖추어지자 누르하치는 그들을 이끌고 부쿠루가 있는 투렌성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내부의 배신자, 사르후성의 주인 노미나가 이것을 부쿠루에게 노출하여 부쿠루는 몸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부쿠루가 없어진 투렌성을 끝내 함락시키고 그 곳을 점령했다. 누르하치의 여진 제패를 향한 행보의 첫 발걸음이었다.---
자신의 거병 소식이 알려졌음에도 어찌어찌 원수 부쿠루의 거점, 토렌성을 함락한 누르하치는 자신의 거병 소식을 부쿠루에게 알린 내부의 배신자, 노미나를 향해 바로 검을 뽑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노미나가 자신을 속인 것을 모른척 하며,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부쿠루를 격퇴하면서 순식간에 상승한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여 주변 세력들을 자신의 아래로 끌어들이는데에 집중했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과연 노미나를 그대로 놔두려 했을까? 답은 '아니다'이다. 누르하치는 은원에 확실한 인물이었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이에게는 관용과 보답을, 자신을 속이고 자신을 배신한 이에게는 철저한 징벌을. 그것이 누르하치의 방식이었다. 그는 급하게 노미나를 공격하지 않고 그를 이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노미나가 자신에게 "힘을 합쳐 바르다이를 점령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고 서신을 보내오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 하였다. 막상 노미나는 출진의 때가 되자 머뭇거리며 먼저 진격하지 않고, 누르하치에게 먼저 공격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노미나 역시 누르하치를 이용하려 했던 것이었다. 즉슨, 누르하치를 몸빵으로 세우고 그를 이용해 바르다이를 함락하려 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노미나의 의중에 따르는 척 하면서 역으로 그를 공격해버렸다. 결국 이 싸움으로 누르하치는 노미나와 그 동생 나이카다를 죽이고 그의 세력을 흡수했다. 사르후 성이 바로 그의 거점이었는데 누르하치는 그 곳을 점령했다. (그러나 이 곳은 누르하치를 향해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
토렌성을 점령하고, 사르후성의 노미나를 잡은 누르하치는 순식간에 건주 여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그가 속한 건주 여진의 숙수후부의 많은 이들이 누르하치의 산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여전히 불안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는 자신을 오래토록 핍밥해온 계모의 죽음에 관련된 것으로 인해 계모쪽 일족으로부터 원한을 사고 있었다. (여진, 청나라 사료에는 이에 관련한 부분이 거의 존재치 않아 추측할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주변의 군주들은 새로운 강자의 등장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누르하치는 내부와 외부의 적 모두와 싸워야 했다. 결국 누르하치의 일족에서 본격적인 배신이 나왔다. 그들은 하다 일족의 군대를 끌어들여 누르하치를 격파하려 했다. 누르하치와 같은 일족 리다이가 그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휘하 제장-후일 후금 5대 개국공신중 한 명이 되는 숑코로 바투르- 안퍙워와 그 휘하 용사 바순이 그들을 박살냈다. 누르하치가 하다의 군대를 격파하자 일이 급해졌다. 리다이는 자신의 거처로 도망쳤고, 일족 내부에선 아예 암살로 누르하치를 죽이자는 의견이 나왔다. 일은 빠르게 시작되었다.그러나 첫번째 암살 시도가 발생했을 때에는 누르하치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무장을 하고 암살자들을 쫓아 실패했다. 두번째 암살 시도가 발생했을 때에는 이번엔 누르하치가 기르던 개가 암살자들을 발견하고 짖어, 누르하치가 암살자들을 쫓아 실패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외부의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일족을 포용하려고 했던 누르하치도 야마가 돌기 시작했다. ----
두 차례의 내부적 암살이 실패로 끝난 뒤, 누르하치는 결국 자신을 해하려 한 이들을 상대로 징벌을 하기로 결심했다. 첫 번째 대상은 하다 씨족을 끌어들여 자신을 공격하게 했던 배신자 리다이였다. 1584년 1월, 누르하치는 리다이가 숨어 있는 조오갸성을 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길이 험하고 눈이 많이 와 진격속도가 느려졌다. 그런 와중에 누르하치 내부 군대에서 또 다시 배신자가 나왔다. 그는 롱돈이었는데, 역시 누르하치와 같은 일족이었다. 그의 배신으로 리다이는 누르하치가 자신을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사실을 알고 방비를 튼튼히 했다.
한편, 누르하치 군대 내부에서는 진군속도가 너무 느리고 길이 험하니 퇴각하자는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그 의견들을 모두 물리치고 진격을 서둘렀고,
마침내 조오갸성 근처에 이르렀다. 조오갸성의 리다이는 이미 누르하치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튼튼한 방비를 해두었다.
그것을 보고 또 다시 누르하치 군 내부에서
퇴각하자는 의견이 나왔다.누르하치는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퇴각할 수 있겠느냐며, 북을 치고 공성을 시작했다.
의외로 공성은 쉽게 끝났다. 누르하치의 공성 지휘가 그만큼 뛰어났던 탓이었다. 또한 방어 지휘관인 리다이가
자신이 튼튼히 준비를 했음에도 자신을 벌하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짓쳐들어오는 누르하치에게 겁을 먹은 탓도 있었을 것이다.
조오갸성이 함락된 뒤 리다이는 몸을 묶이고 누르하치 앞으로 끌려나왔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일족인 리다이를 처형치 않고 용서해주었다.
누르하치는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다. 동생 슈르하치와 함께 명나라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얻은 교훈으로,
그는 이 비정한 초원에서 정녕 믿을 것은 가족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 때 까지는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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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 리다이의 조오갸 성을 함락한 누르하치는 군대를 이끌고 복귀했다. 그러나 또 다시 내부에서 반란의 음모가 터졌다. 이번 원정에서 리다이에게 누르하치군의 거병 소식을 알리며 남몰래 배신한 롱돈이 바로 이번 배신의 주체였다.
롱돈은 누르하치의 숙부였는데, 그는 다른 일족들까지 종용하면서 누르하치를 배신할 것을 권유했다.
그 주요 대상은 삼잔이었다. 삼잔은 누르하치의 양모, 나라 컨저의 동생으로서 누르하치의 양외숙부였다.
롱돈은 삼잔에게 지난 일(누르하치가 나라 컨저의 죽음에 관계된 일)을 꺼내들며 누르하치를 배신할 것을 종용했다.
결국 삼잔은 이 충동질에 배신하게 된다. 그는 누르하치에게 복수를 선포하고 누르하치의 매부인 가하샨 하스훠를 죽인 뒤 그 시체를 마을에 방치했다.
누르하치는 이 소식을 듣고 분기탱천하여 즉시 군대를 소집, 매부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출격하려했다.
그러나 아무도 급습등이 두려워 누르하치를 따라 가려 하지 않았으며, 누르하치 본인에게도 '지금 가면 기습을 당할 우려가 있다.' 고 간언하며
잠시 진정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갑옷을 입고 단기필마로 출격,
가하샨 하스훠가 죽은 마을에 다다라 분노에 찬 목소리로 사자후를 질렀다.
"누가 나를 죽일 것이냐! 나와라! 전부 상대해주마!" 누르하치의 그와 같은 모습에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고, 누르하치는 매부의 시신을 회수하여 복귀했다. 그는 매부의 시신을 장사지낸 뒤,
눈물을 흘리며 더 이상 배신자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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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의 매부이자 그의 충실한 동반자, 가하샨 하스훠가 누르하치 일족 내부의 배신자들에 의해 죽었다.
누르하치는 이에 분노하여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단기 필마로 매부의 시신을 회수, 복수를 다짐했다.
그러나 아직은 군대를 회복시켜야 할 때였다. 리다이 원정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누르하치는 초여름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그럴때에 또 다시 누르하치에 대한 암살 미수가 발생한다.
1584년 4월, 또 다시 야밤에 침투한 암살자는 누르하치를 죽이려고 그의 자택 인근까지 침투했다.
누르하치는 낌새를 눈치채고 잠복하고 있었는데 암살자가 어디에 있는지는 파악치 못했다. 그러다가 암살자가 아주 가까이 접근하고서야
서로를 발견하고, 칼등으로 암살자의 목을 내리쳐 기절시켜 제압, 사람들을 불러모아 암살자를 묶게 하였다.
암살자는 자신을 그저 좀도둑이라고 칭하며 자비를 청했고, 누르하치는 할 수 없이 그를 용서해주었다.
어찌하여 그리하는지 주위 사람들이 물으니
누르하치는 "자신의 기반이 아직 미약하기에 이 스스로를 소도둑이라고 칭하는 암살자를 죽이면 그것을 명분삼아 자신에 대한 연합군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1달 뒤 5월에도 이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누르하치는 암살자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그때쯤, 누르하치의 복수를 위한 검은 거진 다 갈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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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에게 암살 위협을 받고, 심지어 그들에게 또 다른 가족을 잃었다. 누르하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개월 동안 오직 검만을 갈았다.
완벽한 복수를 위해, 완벽한 응징을 위해. 그는 암살자를 붙잡았음에도 돌려보낼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복수의 검이 날카롭게 갈렸다. 그것은 1584년 6월이었다.
누르하치는 매부 가하샨 하스훠의 복수를 천명하며 그를 죽인 삼잔과 그 형제들에 대한 복수전을 선포했다.
훈련과 전투로 최강의 창으로 단련된 400명의 전투전사들이 그와 함께 일어났다.
그들의 거점 마르둔성이 바로 이번 원정의 목표물이었다.
마르둔성은 험준한 지형을 끼고 있는 전술 요새였다. 삼잔과 그 일족들, 남잔, 너신, 완지간 등은 그 성에 군대를 데리고 웅거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길이 험준함에도 공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1차 시도는 실패했다. 다만 누르하치가 화살로 적 지휘관중 한명, 너신을 저격하여 그를 부상입힌 것이 성과였다.
전면공격이 실패하자 누르하치는 성을 포위했다. 주위가 험준한 것을 이용하여 각 병력들을 적재 적소에 매복시킨 뒤 그들의 물길을 끊었다.
그나마 있던 물길이 끊겨 식수 수급이 원활치 않자 마르둔 내부에서는 결사항전의 의지가 꺾여나갔다.
적들이 지쳤을 때쯤, 마침내 누르하치가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스스로 갑옷을 벗고 경보병 위주의 기습부대와 함께 마르둔성을 야습했다.
지쳐있던 마르둔성의 군대는 야습에 완벽히 당해버렸다. 그들은 누르하치와 그 군대에 도륙당했다.
가까스로 너신과 완지간만은 몸을 빼내어 도주했지만, 나머지는 모조리 죽거나 항복해버렸다. 누르하치는 마르둔을 점령한 뒤, 군대를 이끌고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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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둔을 함락하고 매부의 원수를 갚은 누르하치를 향해 이번에는 또 다른 적대세력이 검을 들이밀려 했다. 그것은 동오세력이었다. 그들은 이전에 누르하치의 일족이기도 한 닝우타와 하다의 연합군에게 공격을 당하여 큰 피해를 입었던 이들인데 누르하치와 다른 닝우타 일족들이 서로 싸우며 복수의 연쇄를 이어나가자 이때를 기회로 여기고 닝우타를 치려 했다. 그러나 동오 내부에서는 전쟁의 시기등을 두고 내분이 벌어졌다. 누르하치를 치기 위해 준비한 군대는 곧 서로를 향해 보내졌고, 동오 세력은 서로 칼부림을 일으켰다. 누르하치는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마르둔을 함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사들이 피곤함에도 동오를 선제공격해서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뭇 중신들이 그런 누르하치를 말리기도 했으나, 누르하치는 "지금 동오를 공격치 않으면 역으로 우리가 밀린다."고 말하며 거병했다. 이전보다 좀 더 늘어난 500명의 군대가 누르하치와 함께 동오의 버일러, 아하이 바얀의 치기다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아하이 바얀은 전쟁 준비 덕분에 누르하치에게 그리 꿀리지 않는 400명의 군대를 데리고 있었다.
500 대 400. 숫적으로 보면 누르하치가 우위에 있었으나,
병력의 질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고, 누르하치의 군대는 피곤해 있었으며, 게다가 누르하치쪽이 공세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바얀이 출성하여 공격을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는 누르하치의 지휘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숫적 차이가 별로 안난다고 출성해서 싸우는 것은 도박이었다.
결국 싸움은 긴 대치로 이어졌다. 누르하치가 지속적으로 치기다성을 공격했으나 치기다성의 방비는 튼튼했고 결국 함락보다 눈이 먼저 와버렸다.
폭설이 내리자 누르하치는 철군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누르하치의 후퇴를 파악하고 바얀은 누르하치의 후위를 습격하기 위해 기병대를 보낸다.
그러나 누르하치 역시 자신이 후퇴하면 바얀이 후위를 공격하기 위해 추격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소수의 궁병대와 함께 직접 후위에 남아 거점에 매복, 적의 추격대 선봉이 매복 지점에 다다르자 화살을 쏘며 그들을 제거했다.
매복이 있는 것을 파악한 바얀은 더 이상 누르하치를 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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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기다 성을 함락하기 전에 큰 눈이 내려, 결국 후퇴를 결정한 누르하치는 퇴각전을 하던 도중 추격해온 적들을 격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결국 후퇴는 후퇴, 누르하치는 검을 뽑았음에도 성을 함락치 못한 것을 아쉬워 한다. 그럴 때 왕야 가문의 암반(Amban. 직역 : 크다. 여기서는 지도자격 지위의 인물을 뜻함) 순자친 구왕운이 누르하치를 찾아왔다. 그는 옹골로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포로로 붙잡혀 큰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누르하치를 찾아온 이유 역시 옹골로에 대한 것 때문이었다. 구왕운은 누르하치에게 자신과 힘을 합쳐 옹골로를 토벌하자고 제안했다. 누르하치 입장에선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옹골로 역시 자신의 잠재적 적이었으며, 마침 군대도 해산치 않고 동원한 상태였기에 공격하기에 용이했다. 누르하치는 구왕운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와 함께 옹골로를 공격키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구왕운의 큰조카, 다이두 머르건이 이 정보를 옹골로에 노출했다. 무슨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자신의 삼촌을 제거하고 자신이 왕야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옹골로의 지도자들은 누르하치와 구왕운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성밖의 사람들을 성안으로 들이고 단단히 방어 준비를 하였다. --- 왕야 가문의 암반(Amban, 지도자격 직위를 뜻함.) 순자친 구왕운과 연합하여 옹골로의 성을 공격하기 위해 나선 누르하치는
우선 옹골로 성 주변의 가옥들을 불태우며 적들을 압박하였다. 옹골로는 이미 순자친 구왕운 세력 내부의 배신자, 다이두 머르건의
정보 유출을 통하여 누르하치와 구왕운의 공격을 미리 파악했기에, 성 밖의 마을에는 사람들이 없던 상황이었다.
누르하치는 이후 적성의 참판까지 불태우고, 공성을 진행하였다. 그의 군대가 성벽을 올라가기 시작하며 적을 밀어붙였다.
누르하치 본인 역시 직접 아직 남아있는 성밖 가옥 위에 올라가 적들을 향해 활을 쏘며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그러나 최고 지휘관인 누르하치가 이렇게 나서는 것은 옹골로 입장에서도 역전의 기회였다.
누르하치가 홀로 떨어져 있을 때를 노려, 옹골로의 용사, 오르곤이 누르하치를 저격하였다.
누르하치는 그것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충격이 강했을 뿐, 투구 덕분에 치명상까지는 입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자신을 쏜 상대를 발견하고 그를 향해 역저격을 시도했다. 그것은 정확히 명중하여 오르곤은 누르하치의 화살을 피하려다가 다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옹골로의 용사가 오르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누르하치가 주변 가옥들과 성 위의 방어시설들을 불태워 연기가 많이 나는 틈을 타서, 이번엔 로코라는 이가 연기를 뚫고 튀어나왔다.
로코가 쏜 화살은 누르하치의 치명적인 급소 인근에 맞았는데, 다행히 즉사부위를 비껴나가 누르하치가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치명상인 것은 확실하여 누르하치는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에 놓였다.
근처에 있던 근위들이 누르하치를 도우려 했으나
누르하치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목소리를 짜내, 자신을 돕기 위해 올라오지 말라고 하였다. 자신이 부상을 입은 것이 들키면 적에게 반전의 기회를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몸을 추스려 위험지대에서 물러난 뒤, 그때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누르하치는 즉시 후방으로 이송되었고, 그 곳에서 사경을 헤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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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는 오르곤과 로코에게 연이어 저격을 당하였고, 그 중에서도 로코의 저격에 목을 부상입고 후송되었다.
누르하치는 죽음을 목전앞에 두었으나, 다음날서 가까스로 출혈이 멈추고 이후 조금이나마 몸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총사령관이 이런 상태로 계속 연이어 공격을 할 수는 없는 법이었기에, 결국 누르하치의 군대는 회군하였다.
얼마 뒤, 누르하치는 자신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다시 옹골로를 공격했다.
이미 지난 공성전으로 방어능력이 대부분 사멸된 옹골로는 그 피해를 회복하지 못했고, 누르하치의 재차 공격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누르하치의 공세에 의해 옹골로 성은 완전히 함락된다.
2차 공격으로 옹골로성에서 수 많은 포로들이 잡혔다. 그 중에는 지난 번 누르하치를 부상입힌 오르곤과 로코도 있었다.
누르하치의 제장들은 그 자들을 죽여 감히 자신들의 대장을 상처입힌 복수를 하려 했으나 누르하치는 그들을 말렸다.
누르하치는 "그 때 이들은 나의 적이었기에 나를 쏜것일 뿐이다. 이들은
혼전속에서 나를 저격한 대장부들이니 마땅히 거두어야 한다." 라고 말하며
오르곤과 로코를 비어관-니루 어전(Niru Ejen. 300명의 장정을 통솔하는 직위, 다만 이는 후금 시기부터 적용된 기준이며 이 당시에는 그리 많은 장정을 다루진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으로 삼아 자신을 근위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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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4년 한 해 동안, 누르하치는 자신의 매부 가하샨 하스훠를 죽이고 자신을 배신한 자신의 양외삼촌 삼잔과 그 일족들을 죽이고,
그들의 머르둔 요새를 함락했다. 그리고 동고의 아하이 바얀과 싸우고, 옹골로 성을 함락했다.
수많은 암살 위협들을 이겨내고, 죽을 고비 조차 뛰어넘은 누르하치는 건주 여진에서 가장 가파른 상승세를 타는 존재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견제가 누르하치에게 가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1585년 겨울, 2월에 누르하치는 병사 50명만을 데리고 철진의 자이퍈성 주변을 정찰겸하여 약탈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 구성에는 중기병이 25명, 경기병이 25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자이퍈은 이미 누르하치가 움직인다는 정보를 듣고서 방비를 철저히하여, 노략질도, 정찰도, 큰 소득은 없었다. 결국 누르하치는 회군을 하려 했다.
그러나 철진은 누르하치가 회군을 하려는 때를 노리고 있었다. 누르하치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이미 누르하치를 족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연합군은 누르하치가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행동에 나섰다.
연합군은 자이퍈성의 군대와 사르후성(이전에 누르하치가 점령했었으나 반란을 일으켰다.), 바르다이성, 둥기야의 군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의 기병은 총 400명이었기에, 고작 50명만을 이끌고 온 누르하치는 절대 그들을 전면승부로 이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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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50명의 기병만 이끌고 자이퍈 성 인근에 이르렀던 누르하치는, 별 소득 없이 회군하던 도중 뜻밖에 매복하고 있던
4개 세력의 연합군(자이퍈, 사르후, 바르다이, 둥기야) 400명의 기병의 추격을 맞이하게 된다.
그 기병들을 이끄는 것은 각 성의 최고 지휘관들이었으며, 누르하치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었다.
추격전끝에 결국 그들은 타이란 등성이에서 조우하게 되었다.
적 기병대의 선봉대는
자이퍈의 성주 너신(그는 마르둔성에서 이미 누르하치와 싸웠다가 겨우 도망친 전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과 또 다른 지휘관 바무니가 이끌고 있었다. 더 이상 후퇴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누르하치는 적의 추격대와 싸울 것을 결의하고 적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직접 선봉에 서서 적장들과 맞썼다.
우선 첫 상대는 너신이었다. 그가 바무니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신은 누르하치를 향해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올려 세운 채찍만을 베었을 뿐이었다.
누르하치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너신을 베어죽였다. 너신은 그렇게 쓰러졌다.
그것을 본 바무니가 누르하치에게 달려 들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검을 놓고 아직 꽤 거리가 벌어져 있는 바무니를 향해 활을 쏘았다.
바무니는 차마 그것을 막지 못하고, 그것을 맞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두 적장이 순식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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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를 죽이려고 선봉에서 돌격해오다가, 역으로 누르하치에게 죽은 너신과 바무니.
두 장수가 순식간에 누르하치에게 죽자 자이퍈의 군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일시적으로 주춤거리며 감히 공격해 들어오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군대에 하마해 활를 쏘게 하여 적과의 거리를 다시 벌린 뒤, 그들에게 서서히 후퇴토록 했다.
마침내 그 지시사항들이 이행되고 군대의 퇴각이 끝나자 누르하치는 홀로 너신과 바무니의 시신 앞에 섰다.
마침내 대열을 추스르고 누르하치에 근접한 자이퍈의 군대가 누르하치에게
"우리의 두 장수를 죽였음에도 어찌 그 자리에 서 있는가? 그대가 돌아가면 우리도 돌아가겠다." 라고 말했다.
누르하치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급히 도망치면 그들은 곧 자신을 향해 화살을 날릴 것이 분명했다.
누르하치는 자이퍈의 군대에 이렇게 말하며 허세를 부렸다.
"너신은 나의 원수이다(너신은 누르하치의 매부, 가하샨 하스훠의 죽음과 관련이 되어 있었다)
. 그를 오늘 죽였으니 그 시신을 응당 씹어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자신의 원수인 너신의 육신을 씹어 먹어 복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자이퍈 군대는 겁에 질려 감히 누르하치를 손대지 못했다.
(사서에는 언급되지 않으나 일시적으로 뒤로 물러났을 가능성이 있다.)
누르하치는 그들의 사기가 다시 한 번 꺾이자 그제서야 천천히 물러났다.
힘껏 적들의 사기를 꺾었는데 여기서 급속히 도망친다면 적들이 자신의 허세를 파악할 것이 분명했다.
누르하치의 생각대로, 자이퍈 군대는 누르하치가 물러남에도 그를 추격치 않고 시신만 수습하고 잠시간 멈추었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군대와 합류하여, 지치고 피로한 병사들을 우선적으로 후퇴시킨 뒤 자신은 최후미에 남아 매복했다.
그러나 매복한 병사들의 숫자란 것이 형편이 없어서 누르하치를 포함해도 8명 정도였다.
이것은 매복을 해보아야 적 몇 명만 죽일 수 있을 뿐 승리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매복의 흉내만 낸 허장성세를 행했다.
일부러 투구들을 노출시킨 뒤 자이퍈 군대에게 많은 수의 자신의 군대가 이 근처에 매복해 있는것처럼 보여, 그들이 지레 겁먹어 후퇴하게 하는 것이었다.
누르하치의 생각은 통했다. 이미 두 장수를 잃은 자이퍈 군대는 매복의 기세까지 느껴지자 더 이상 누르하치를 추격치 않고 퇴각했다.
누르하치는 적들이 물러나자 바로 군대를 거두고 본거지로 후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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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퍈 성 인근에 고작 기병 50만 이끌고 갔다가, 400명에 달하는 연합군을 만났으나 그들의 선봉장들을 죽이고 겨우 겨우 귀환한 누르하치. 하지만 누르하치는 겁을 먹었다기 보다 오히려 자신감을 얻었다. 적들이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여실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욱 체계적인 준비를 하여 병량과 무기를 확충하고 군대를 조련하였다. 그리고 겨울이 끝난 동해(1585년) 4월, 다시 한 번 군대를 이끌고 출진에 나섰다.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500명의 군대가 그와 함께 했다. 정말로 성을 함락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격도중 대단히 큰 비가 내려, 진격이 힘들어졌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공격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공성은 못하더라도, 최소한 철진의 땅을 약탈하여 그들의 힘을 빼놓을 필요는 있었다. 그는 소집병들은 회군시키고 정예 80명만 뽑아서 계속해서 진격했다. 그런데 이 때 갸하의 족장이 누르하치가 80명의 군대만 이끌고 진격해오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것을 누르하치에 적대적인 다섯 세력에게 전한다. 자이퍈, 장갸, 토모호, 사르후, 바르다가 바로 그들 세력이었다. 각 세력의 영주들은 이전에는 누르하치의 기세에 밀리고, 또 누르하치에게 두 명의 선봉장을 잃어 결국 그의 후퇴를 용인할 수 밖에 없었으나
이번에야 말로 단단히 준비를 갖추어 누르하치를 죽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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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는 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정을 했으나, 폭우로 인해 정예 80명만 추려서 진격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이런 소수정예로 움직인다는 소식을 들은 갸하 부족이 이 소식을 누르하치의 다섯 적대 세력,
자이퍈, 사르후, 장갸, 바르다, 토모호에 알린다.
그들은 이제 단독 세력으로는 절대 누르하치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바로 연합군을 준비하여 누르하치를 요격하기 위해 움직인다.
무려 800명의 군대가 그들에 의해 동원되었다.
아시아권에서 벌어진 고대전쟁 기록으로 인해 10만대군 20만대군등에 익숙해지고,
또한 당시 여진과 같은 시대에 속하면서 중앙집권국가로서 동원병력이 상당했던 조선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ㅈ밥으로 와닿을 수도 있을 테지만
수십개, 많게 잡으면 백여개가 넘는 세력으로 잘게 쪼개진 여진세력에 있어서 이정도는 당시로서 대단한 규모였다.
800명의 군대는 누르하치를 향해 급속도로 기동하여 그가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채어 군을 물리기 전에 그를 육박했다.
누르하치 역시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였기에, 척후를 세우는등 이런 기습공격에 대비를 해두었으나 척후가 적군보다 늦어 결국 적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자신들이 일찍이 상대한 적 없는 규모의 연합군이 전면으로 오자, 누르하치 휘하의 병사들과 장수들은 이에 크게 겁을 먹었다.
어찌나 공포가 심했던지, 누르하치의 일족이기도 하던 상구리와 자친 역시 겁을 먹고 자신의 무장을 다른 이에게 쥐어줘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적의 구성이 대부분 징집병이며, 급하게 연합한 병력이다보니 명령체계가 미흡한 것을 파악,
초전에 적 전열을 부숴 흩어버릴 목적으로 싸움에 임했다.
그는 동생 무르하치, 그리고 두 명의 휘하 제장들과 함께 선봉에 서서 공격했고(사서에 이르길, 이들 네 명만이 공격에 참여했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어느정도 과장이 들어갔다), 그들이 열심히 분전한 탓에 연합군의 대열이 무너졌다.
결국 800명의 연합군은 80명의 군대를 채 이기지 못하고 퇴각했다.
사실, 연합군의 사망자 자체는 별로 되지 않았으나 지레 겁을 먹고 대열이 무너진 것이었다.병사들은 추격을 건의했으나, 누르하치는 선봉에 서서 싸우느라 너무 지친 상태였기에 바로 추격치 못했다.
그러나 잠시 휴식후 추격을 하기는 하여서, 적들을 추격하여 그 후방을 짓눌러 다시 수십명을 죽이는 전과를 얻었다.
결국 누르하치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주변부 적대 세력들에 대해 완전히 주도권을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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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퍈, 사르후, 장갸, 바르다, 토모호, 다섯 성 영주들의 연합군의 공격을 이겨낸 누르하치는 이제 주변부에선 무서울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서두르지 않았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또 적들이 연합을 구성하면 골치아파지는 것은 자신이었다. 비록 지난 전투에서 적들을 크게 이기긴 하였으나, 병력수의 차이로 인하여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진 못했기 때문이었다. 누르하치는 이후로 5개월여동안 군대를 다시 훈련시키고 병량과 무기를 충당하고 말들을 살찌웠다. 그리고 동해(1585년) 9월, 안투 구왈기야를 공격했다. 누르하치가 숱하게 공격하던 대상들과 달리 그들은 누르하치에게 첫 표적이 된 참이었다. 그 곳의 성주 노이모혼은 누르하치의 군대에 맞서 용렬히 저항했으나
누르하치의 군대는 그의 군대를 처참히 부수고 그의 성을 함락했다. 누르하치는 나이모훈을 죽이고 안투 구왈기야를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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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투 구왈기야를 함락한 누르하치는 다시 군대를 쉬게 했다. 곧 겨울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겨울이라고 하여 작전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더욱이 전투를 거친 뒤였기에 한 차례 쉴 필요가 있었다.
누르하치는 내정을 살피며 군대를 조련하고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진격해야 했다. 멈추지 않으면 고꾸라지는 것이 여진 부족장의 삶이었다.
그는 이듬해(1586년) 5월, 다시 군대를 이끌고 후너허부의 보이훈 성을 공격했다. 이번 공격 역시 성공이었다.
누르하치는 보이훈을 함락한 뒤 점령했다.
그 뒤 목표는 자신을 끈질기게 방해했던 토모호성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병사들을 그리 오래 쉬게 하지 않고 바로 진격해 들어갔다.
1586년 7월 그는 토모호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자연재해에 더불어 토모호의 저항이 끈질겨 공성 자체는 실패했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공격에 인해 토모호 역시 지친 상황이었고, 회유 끝에 토모호를 자신의 세력 안에 편입시키는데에 성공했다. 토모호는 그렇게 복속되었다.
그외 작은성들은 누르하치 본인에 의한 친정이 아니라, 그의 휘하 장수들, 어이두나 안퍙궈 등에 의해 복속되었다.
(비록 서술을 생략하긴 했으나 1586년 이전에도 많은 성들이 어이두와 안퍙궈에 의해 함락되었다.)그것은 무섭도록 빠른 세력 확장 속도였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첫 번째 진짜 목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누르하치가 생각하는 자신의 가장 큰 원수중 하나인
퉁기야 부쿠루가 아직 자신의 손에 죽지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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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누르하치에게 단독으로 맞설 세력은, 최소한 그의 주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진 전체를 놓고보자면 강력한 적들이야 많고 많았고 또한 현재의 누르하치보다도 강력한 세력들이 즐비했으나 그들 역시 모두 본인들 주변에 신경쓰기에 바빴다. 누르하치는 이 틈에 자신의 원수, 부쿠루를 처단할 것을 생각했다. -부쿠루는 흔히 니칸 와일란(한족 통사)로 알려진 인물인데, 그것은 그가 명나라와 그만큼 강한 커넥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당시의 부쿠루는 끈떨어진 몰락한 족장에 지나지 않았다. 누르하치에게 패배한 뒤 그는 사실상 손절의 대상이었다.-
누르하치는 부쿠루가 숨어있는 곳을 샅샅이 수색하고 정보를 모았다. 그러다가 그가 숨어있다는 소재지가 오르혼성으로 파악되자
즉시 군대를 몰고 가서 오르혼성을 공격했다. 이 때가 1586년 7월인데, 토모호성을 손에 넣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오르혼성은 누르하치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바로 문을 걸어잠갔다. 그러나 성밖에 미처 들어오지 못한 군대가 있었다.
그들은 결국 누르하치를 피해 도망치려 했으나, 누르하치는 그들이 바로 부쿠루와 그 휘하 병사들 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 먼저 공격했다.
누르하치는 그들과의 싸움에서 온 몸에 30여군데의 상처를 입었으나 직접 수 명의 적을 참살하고 또 휘하의 군대로 그들을 짓밟아 섬멸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부쿠루가 있다는 것은 순전히 누르하치의 착각이었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누르하치는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오르혼성을 공격했고, 오르혼성을 함락했다.
오르혼성에도 역시 부쿠루는 없었다. 그는 이미 누르하치가 두려워 명나라의 변경부대로 도망친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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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원수, 부쿠루가 오르혼성에서 도망쳐 명나라의 변경 주둔 부대로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은 누르하치는 큰 성을 내며 오르혼성에서 잡힌 포로들을 죽이고, 오직 부상자들만 살려 명나라의 수비 진지에 보내 부쿠루를 내놓으라고 전했다.
명나라의 수비군은 처음에는 누르하치의 요구를 거절했으나, 누르하치가 워낙 완고하게 부쿠루를 내놓으라고 성을 내자
결국 타협점으로 누르하치에게 "우리는 부쿠루를 보호치 않을 터니 직접 와서 죽이라"는 제안을 보낸다.
명나라에 오랜 시간 충성해온 부쿠루였으나, 누르하치에게 모든 거점을 뺏겨 이미 세력이 멸망한 부쿠루를 보호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누르하치는 여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강력한 부족장이었으니 그의 제안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전 누르하치가 부쿠루를 자신에게 넘겨달라 했을 때 코웃음치며 무시했던 것과는 비교가 된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이런 발언을 의심하여 혹 함정이 아니냐고 반문했고, 수비대장은 다시 타협점을 제시해 누르하치에게
"그럼 부하들을 보내어 죽이라." 는 제안을 보냈다.
누르하치는 거기에 응했다. 그는 기병대 지휘관 자이사와 40명의 기병을 보내어 부쿠루의 목을 가져오게 했다.
부쿠루는 세력도 잃고, 명에게도 버려지어 홀로 자이사와 기병대 앞에 서게 되었다. 그는 끝까지 도망을 치려 했으나
자이사에게 죽은 뒤 그 목이 베어졌다. 자이사는 부쿠루의 목을 누르하치에게 바쳤다.
누르하치의 복수는 여기서 끝이었을까? 자신의 원수인 부쿠루가 죽었으니 진격을 멈출까?
아니, 그의 복수와 진격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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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원수 부쿠루를 죽인 누르하치. 그러나 그의 진격은 여기서 멈출 것이 아니었다.
100명의 병사, 13벌의 갑주로 거병한 누르하치는 고작 3년 사이에, 건주 여진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나 아직 저항하는 세력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누르하치는 그들을 자신의 세력 하에 편입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누르하치에게는 그보다 우선해서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거점성을 지금의 허투 알아에서 퍼 알아로 옮기는 것이었다.
당시 누르하치의 본거지인 허투 알아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개 부족장의 거처였기에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허투 알아 인근에 새로운 성을 쌓고 그 곳을 자신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퍼 알아이다.
조선측 기록에 따르면, 퍼 알아는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이 되어 있었으며 외성의 높이는 10척 이었으며 그 안팎에 진흙을 발라 성의 견고함을 더했다.
내성 역시 외성과 비슷한 높이와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성벽 위에 망루등을 설치해 방어력을 보강했으나,
해자는 없었다. 물길을 끌어오기가 쉽지 않아서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내성안에는 또 목책으로 둘러쌓인 방어진이 있는데 이 안에 누르하치의 저택이 있었다. 즉, 퍼 알아 자체는 총 3개 방어 구획으로 나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내성 안에는 100호가 살았는데, 이들은 누르하치의 친족이나 고위직들이었다.
외성안에는 장수들과 그 친지들이 살았고, 성 밖에도 주민들이 살았다. 이들의 대부분이 비상소집시 군인으로 전환될 수 있는 이들이었다.
즉, 누르하치의 거점은 유사시 거주 인구 대부분을 군인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성 안에는 우물들이 있었으나, 그 물길이 깊지는 않아서 보통 사람들은 성 밖의 냇가에서 물을 수급해왔다고 한다.
이러한 조선측의 기록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왜냐면, 이 기록을 쓴 신충일이 바로 퍼 알아에 가서 누르하치를 직접 만났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퍼 알아에 대한 기록은 사실 이 신충일의 기록에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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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작은 거점, 허투 알아에서 새롭게 지은 성 퍼 알아로 거점을 옮긴 누르하치.
누르하치는 그 곳에서 본인을 수러 버일러(Sure Beile, 총명한 지도자 라는 뜻. 본래 누르하치는 이전까진 수러 바투루-Sure Baturu를 칭했다.)라고 칭한 뒤
자신의 영토에 법과 치안을 확립하였다. 사사로운 도둑질과 약탈등을 금하고, 병사들로 하여금 치안을 유지케 한 것이다.
(다만 이 수러 버일러 칭호 사용에 관해서는 1589년 이란 이야기도 있다. 1587년에서 1589년 사이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 뒤 행정부를 구성하여 정치를 시행했다.
여러모로, 이러한 누르하치의 행동은 작은 왕국의 왕과 같았다.
(그런 탓인지 이 당시의 조선에선 누르하치가 왕을 칭했다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때가 1587년 6월 이었다.
1583년 본격적으로 검을 빼들은 뒤 고작 5년여만에 그는 스스로를 버일러라고 칭하며, 자신의 원수를 갚고, 주위의 세력을 완전히 복속시킨 것이다.
그의 나이가 막 30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한편, 그는 거점을 옮기고 행정을 실시하면서도 정복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거점을 옮기자 마자 철진의 아르타이를 공격하였고, 그를 죽인 뒤 그의 성을 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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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잠깐 거슬러 올라가서, 누르하치가 부쿠루를 죽였을 때로 돌아가보자.
누루하치는 부쿠루를 죽일 당시 명나라의 암묵적인 동의를 얻은 뒤 기병 지휘관 자이사와 40명의 기병을 보내어 부쿠루를 죽였다.
그것도 보통 죽인 것이 아니라, 명나라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부쿠루를 죽였다.
명나라 병사들은 부쿠루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애초에, 부쿠루를 버린 것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후 명나라는 누르하치에게, 이전에 명나라가 누르하치의 조부인 기오창가와 아버지인 타크시를 (명의 주장상 오해로)죽인 것에 대한 보상 명목으로
매년 은자 800냥과 비단 15필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명목만 기오창가와 타크시의 죽음에 대한 보상이었지 실제로는 누르하치에 대한 선물이었다.
애초에 둘의 죽음에 대한 보상은 이전 총병 이성량이 칙서 30개와 말 30필을 주는 것으로 종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청사고에 기록된 바이며, 명나라 문서에서는 칙서 20개와 말 20필로 전해진다. 아마도 명나라의 문서가 좀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명이 이렇게 예전 문제를 스스로 꺼내면서 누르하치에게 은자와 비단을 내린 까닭은, 이제 명이 누르하치가 건주 여진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게 선물을 주어 명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 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이에 대해 명의 천자(당시 천자 만력제)에게 황송함을 표했다. (이 당시 만력제는 사실상 파업중이었으나 어쨌거나 대명천자에 황송함을 표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연극이었다. 누르하치는 명에게 외적으로 굽힐지언정, 내적으로는 여전히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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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년 8월, 누르하치는 아르타이의 성을 빼앗고 그를 죽인지 2달도 채 안되어 다시 군대를 일으켰다. 목표는 누르하치를 지금까지 몇 번이고 괴롭혔던 바르다 성이었다.